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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호
2026.07.2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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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주년 의미요?”
박혜경(약사·구로건강복지센터 이사장)이 구로 우리네약국 설립 질문을 바로 되묻고는 답했다. “약국을 만든 취지를 35년간 살려온 거지요.” 그 취지는 바로 공공성이다. 1991년 서울 구로구 구로3동에 공동체 약국을 낼 때 내건 모토가 ‘함께 만드는 건강한 세상’이다.
출발은 1988년 ‘건강의집’이다. 당시 의대생 백재중(록향의료재단 이사장) 제안으로 여러 대학 의대생, 약대생, 간호대생들이 연합 동아리 건강의집을 만들었다. 구로 은강교회에서 주말 진료를 시작했다. 탁아소, 야학, 파업 사업장으로 방문 진료도 나갔다. 이들은 산재, 직업병 예방 교육도 진행했다.
약대생, 의대생, 간호대생 아이디어로 시작
1991년 설립 후 약사 월급, 운영비 뺀 수익 환원
1991년 5월 구로3동에 처음 낸 우리네약국 모습. 1998년 지금 약국 자리로 이전한다. KBS화면 갈무리
구성원들은 주말 활동이나 진료소 대여(교회)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 상설 기관을 만들려고 했다. 의원을 만들려 하니 의대생들이 입대를 하거나 인턴을 해야 했다. 인적, 물적 부담이 적은 약국을 먼저 여는 쪽으로 방향을 모았다. 1990년 8월 26일 ‘약국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1991년 5월 25일 60여 명의 후원금과 일일 찻집 수익금 1650만원, 대출금 1660만원으로 약국을 열었다. 황인태(다솜한의원 원장)가 노동자들을 위한 약국 설립 후원금을 많이 끌어왔다고 한다. 박혜경은 “당시 여러 선후배 약사가 형편이 빡빡했는데도 한두 달 치 월급을 기꺼이 내놓았다”고 말했다.
병원 근처나 시설이 좋은 데는 권리금, 보증금, 월세가 비싸 구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본 다 쓰러져 가는 약국이 우리 돈에 맞았다”(김진숙)고 한다. 구로3동 도로변 오래된 건물 1층, 8평의 작은 규모였다. 약국 셔터는 찢어진 상태였다. 약사들이 가까스로 올리고 내리곤 했다. 건강의집에서 활동한 김진숙과 오성지 두 명의 약사가 개원 초 일을 맡았다.
‘약사들이 약국을 경영하되 매달 일정 급여만 받는다. 급여와 운영비를 제외한 약국 수익금은 지역주민 건강과 복지를 개선하는 여러 사업을 하는 데 사용한다’는 게 대원칙이었다. 부동산을 사는 데 돈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돈을 벌면 환원했다. 박혜경은 “약국은 지금도 월세를 낸다”고 했다.
초기엔 산재, 직업병 예방 책자 만들어 배부도
여성, 장애인 등 약자 위한 활동까지 영역 확장
박혜경은 이듬해 10월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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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멋지다고 흠모해 오던 벗(김진숙)이 어느 날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던 순간의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 동기였다.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 중 일부는 졸업하고 노동 운동하러 공장으로 갔는데 우리 졸업할 무렵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애국적 사회 진출’이라고,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자는 방향으로 전환”(김진숙)되던 때다. 박혜경은 약사로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건약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때 김진숙을 만났다.
박혜경은 1992년 10월 “기쁜 마음”으로 출근했다. 이들은 초기 건강의집 활동을 이어갔다. 김진숙은 구로의원, 푸른치과 의사들이랑 노조로 갔다. 산재, 직업병을 조사하고 예방 책자를 만들었다. 박혜경은 약국에서 책자를 나눠줬다. “일하다 손가락 잘린 분들이 약국에 많이 왔다. 그런 분들이 오면 (푸른치과 내) 노동상담소를 알려드리면서 상담하시라고 했다. 다만 진짜 가셨는지,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몰랐던 것이 한계였다”고 말했다.
우리네약국 약사 6명이 공저로 낸 책 제목이 <마을 품은 약국 - 우리네약국 35년 이야기>인데, 이 제목에 걸맞은 활동을 시작한 게 이때다. 박혜경은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하면서 ‘마을 공동체 약국’을 위한 의지를 굳혔다. 당시 약국 일대엔 합판으로 만든 벌집이 많았다.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집에선 집안 말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박혜경은 “연탄가스 냄새가 심했다는 게 기억난다.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지역 주민이 노동자들이었다. 노조와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우리 약국이 주민을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병원 없이 버틴 약국···이젠 중국 동포 고객 늘어
환경 변화에 경영 위기 겪을 때도 구로 안 떠나
1990년대 여러 언론이 우리네약국을 보도했다. 경향신문 매거진 X는 ‘정 주고 약 주는 여섯 여약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1999년 6월28일자에 냈다. 위 메인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박혜경(딸 수진), 강기옥, 박진희 약사 . 아래 사진 오른쪽이 정애랑 약사다. 이소희 약사는 이듬해 이곳으로 온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 생각은 35년째 실천으로 이어졌다. <마을 품은 약국> 맺음말에 나온 약사들 공통의 소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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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그런 걸 다 했지? 젊을 때니까 힘든 줄 몰랐어. 그래도 그때 함께하는 분들이 옆에 계셨기에 재밌게 거침없이 나아간 거 같아’서였다. ‘그래, 함께 손잡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구나!’”
우리네약국 연혁을 보면 놀랍다. 구로 지역에서 보건의료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은 물론이고 보건당국 일까지 도맡았다. 약국 초기 진료 상담, 조사 연구, 노동·지역 단체 연대 등 건강의집 활동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사업은 ‘건강 교육’이었다. “주민들이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는 생각을 하게 하자는 게 교육 핵심”이었다. 노조 파업 지원 진료 때는 산재, 직업병 예방 교육을, 어린이집 학부모회 만남 때는 피임이나 여성 암 조기 발견, 어린이 응급처치 같은 교육을 했다. 지역 주민 대상 월 1회 일요 진료도 시행했다.
우리네약국 혼자만 한 일은 아니다. 구로 지역 여러 의료기관이 연대했다. 약국, 양한방 의원, 종교기관, 어린이·청년 시설 등이 결합해 튼실하고 의미 있는 ‘의료 연대체’를 이뤘다. 우리네약국과 구로의원, 푸른치과, 구로한의원, 삼대한의원 등은 구로지역 보건의료인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 에서도 한의사를 파견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속 고민합니다”
거쳐간 이들이 함께 쓴 ‘마을 품은 약국’ 출간
구로의원이나 푸른치과 같은 의료기관들도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푸른치과는 “지역 민중운동에 봉사하며 상업적 진료를 지양한다”는 모토를 내걸었다. 구로와 성남·군포 등지 공단과 빈민 지역에 세워졌다. 구로 푸른치과는 노동상담소도 뒀다. 건강의집은 구로청년회, 구로노동자문학회, 구로노동상담소, 다우리노동자회관 같은 노동운동 단체와도 연대했다.
IMF 외환위기 때 ‘엄마 아빠 모두 실직상태인 가족에게는 의료비를 감면해 드립니다’ ‘소년소녀가장과 장애인은 무료 투약합니다’라는 안내 문구를 약국에 붙여뒀다. 구로 보건의료인 네트워크와 함께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가족 의료지원 등을 했다. 실직 여성 가장과 미성년 자녀의 의료비 감면, 아이들 급식과 돌봄을 담당하는 ‘파랑새 나눔터 모임’도 제안했다. 아이들 건강검진 사업을 할 때도 여러 의료기관이 함께했다. 박혜경은 “그때 동네 모든 의사를 다 만난 거 같다. 의사들한테 ‘이런 거 하려는데 같이 참여하시면 어떻겠어요?’ 그러면 대부분 ‘좋다’고 하시며 참여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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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단체가 가난한 집 어린이, 장애인, 혼자 사는 노인에 대한 의료·복지 서비스에 무심하던 시절 우리네약국은 구로 지역 보건과 복지의 중심이었다. 독거 어르신 도시락 배달, 해외 어린이를 위한 약품 기부, 장애인 주말 치과 진료 등 활동을 여러 단체와 연대하며 이어갔다. 2000년 2월 구로건강복지센터를 설립한다. 박혜경은 “장애인, 어린이, 노인을 위해 우리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약국 설립 뒤 해온 활동을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 센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약국은 센터 설립 때 1억 4000만원을 지원했다. 약사들은 월급 인상이나 복지를 뒤로 미루며 센터 종잣돈을 모았다. 지금도 센터 지원에 집중한다. 약국 수익금을 매달 보낸다. 약사와 의사, 활동가 등 개인 176명이 매달 후원금을 낸다. 미트패밀리, 서울남부두레소비자협동자합도 후원자다. 구로한의원은 가장 오래된 후원자이자 연대체다. 이 후원과 연대를 기반으로 센터는 최근까지 요보호아동과 독거노인, 장애인 건강 지원, 청소년 심리 상담, 재가 복지 같은 활동을 해왔다.
를 냈다. 지난달 27일 후원자들, 주민들과 함께 북콘서트도 열었다. 지금 약국 일을 하는 정애랑, 박혜경, 이소희 약사(왼쪽부터)가 지난달 24일 서울 구로동 우리네약국에서 북콘서트 안내 포스터를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7/22/khan/13176lqco.jpg" data-org-width="1200" dmcf-mid="KntdZNgRCB"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7/22/khan/13176lqco.jpg" width="658">
1991년 5월 ‘노동자를 위한 약국’으로 출발한 우리네약국이 설립 35주년을 맞았다. 35년간 약사 7명이 마을 공동체 약국에서 일해왔다. 공저로 <마을 품은 약국 - 우리네약국 35년 이야기>를 냈다. 지난달 27일 후원자들, 주민들과 함께 북콘서트도 열었다. 지금 약국 일을 하는 정애랑, 박혜경, 이소희 약사(왼쪽부터)가 지난달 24일 서울 구로동 우리네약국에서 북콘서트 안내 포스터를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지난달 24일 저녁 인터뷰를 위해 약국을 찾았을 때 이소희(대표 약사)와 정애랑이 매대를 분주히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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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희가 60대 중국 동포 여성에게 위장약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제산제가 섞인 진정제거든요.” 약에 대해 설명을 듣는 도중 중간중간 ‘이쁜 며느리’를 자랑하던 이 여성은 10여 년 단골이라고 한다. 고려대 후문 병원 쪽에 사는데 문전 약국을 안 가고 일부러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여기 약사들 되게 친절해요. 다른 친구들도 내가 여기로 오라고 해요. 여긴 어떤 약을 그냥 사라고 안 줘요. 여러 사항을 제게 확인한 뒤 약 하나를 권해요. 보통 약사들은 안 그래요.”
이소희의 모토는 “작은 친절이 머무는 약국을 이어갑니다”이다. 약국 앞 보행 도로에서 이들 약사를 촬영할 때 여러 주민이 이들 약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 ‘친절’을 떠올렸다.
주민들은 이들 약사에게 마을 공동체 약국이라는 소명을 다시 다짐하게 하는 존재다. 약국 주변 아파트에 사는 박혜경은 15분가량의 출근길에 주민들과 인사 나누는 걸 낙으로 여긴다. 그는 “지금도 우리 약국을 찾아주시는 35년 단골도 있다”고 했다. 35주년 의미를 다시 물었다. 박혜경은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같이, 내 약국처럼 35년을 일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후배 약사 머리의 새치를 볼 때면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일렁인다”고 했다.
이 후배 약사는 이소희다. 2000년 학생회 소식지에 난 우리네약국 기사를 보고는 다니던 제약회사를 관두고 약국에 “자발적으로” 찾아갔다. 그는 “약대 졸업 뒤 제약회사에서 프로덕트 매니저(PM)를 6개월가량 했다. 약품을 상품처럼 여기는 제약회사 업무보다 공공성이 있는 약국에서 일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우리네약국 약사로 일한 건 센터 설립 6개월 뒤 시。이다. 의약분업 여파 등으로 바로 경영 위기가 닥쳤다. ‘문전 약국’이 아니라 어려웠다. 이소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돌발성 난청’에 시달릴 정도였는데도, 격무를 자처하며 이어갔다. 그는 “우리네약국이 없어진다는 건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일만 했다”고 한다.
이소희는 고난의 시기를 떠올리며 “약사 3명이 생활이 가능한 급여를 받기에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구로를 떠나거나 경영 다각화는 하지 않으려 했다. 구로에서 활동을 이어가려고 각오했다”고 했다. 26년 약국을 지키며 이때 고난과 극복을 늘 상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되게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약국이 어려웠던 2000년대 초 박혜경, 이소희와 함께 일한 이가 정애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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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우리네약국에 있다는 것이 자긍심의 근원이었다. 무엇보다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 좋았다”고 말했다. 처음 우리네약국에 온 건 1994년이다. 정애랑은 “병원 약국에서 일할 때 인간관계 등이 힘들었다. 그때 우리네약국 소개를 듣고는 ‘옳다구나’ 하고 단숨에 병원을 관두고 달려왔다. 구로라는 지역의 공동체 약국이라는 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운동이 커가고, 여러 사람이 좋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모색했다. 나도 이런 데 속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지금은 파트타임으로 우리네약국과 다른 약국에서 일한다.
‘마을 품은 약국 - 우리네약국 35년 이야기 북콘서트가 지난달 27일 구로아트밸리 소강장에서 열렸다. 지은이들이소감을 말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서윤미 전 사무국장, 박혜경, 강기옥, 정애랑, 이소희, 김진숙, 김현옥 약사. 우리네약국 제공
“병원 없이도 약국 역사가 30년 넘게 버텨낸 건 약국의 경영 위기가 올 때마다 좋은 기회가 찾아온 덕분인 것 같다. 고비마다 하늘이 약국을 돕는구나 생각했다.” 박혜경의 말이다. 약국 근처에 7호선 남구로역이 개통되고, 디지털 단지가 생기면서 약국 앞 사람 왕래가 잦아졌다. 중국 동포들이 동네로 많이 오면서 또 매출이 늘었다. 이들 노동자가 파스나 진통제 같은 일반의약품을 많이 사 갔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35년 동안 약품 판매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박혜경은 “1990년대에는 감기약, 진통제, 파스 같은 게 제일 많이 나갔다. 요즘은 스마트폰 영향으로 인공눈물 같은 안약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간다. 1990년대에 잘 없던 영양제나 비타민도 지금 잘나가는 의약품”이라고 했다.
지금 약국 경영 상황이 좋지는 않다. 불경기를 체감한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오가며 비타민 음료 같은 걸 사 갔는데, 요즘 일거리가 줄어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약국은 센터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지만, 그 액수가 이전보다는 줄었다고 한다. 박혜경은 곧 정년이라 또 약국이나 센터의 미래를 두고 걱정한다.
박혜경은 “단지 약을 많이 팔아 센터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약국 설립 취지인 공공성을 어떻게 지속해 나갈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대표 약사인 이소희도 이 공공성 문제를 고민한다. “한편으로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저희를 신뢰해 주시는 주민분들도 계시고, 꾸준히 후원해 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저희는 그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 약사가 다시 공공의 약국, 마을 공동체 약국이라는 소명과 각오를 다지려 낸 게 <마을 품은 약국>이다. 이들은 주민, 후원자들과 함께 같은 제목의 북콘서트를 지난달 27일 열었다.
강기옥, 정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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